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문단 편집) == 여담 == * 1530년 [[카를 5세]]의 군대에 [[피렌체]]가 침공당했을 때(가비나라 전투)에는 방위 대책 위원 중 한 명으로 뽑혀 성벽 건축을 맡기도 했다.[* 우습게도 이 피렌체를 침공한 [[카를 5세]]와 교황은 한 편이었다. 교황은 [[사코 디 로마]]에서 로마를 털린 이후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카를 5세와 화해해 같은 편을 먹었다. 한 마디로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고용주를 배반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피렌체가 패망하고 카를 5세가 승리해버렸기에 [[사형]]당할 수도 있었지만, 교황이 앞장서서 미켈란젤로를 그냥 용서해주고, 다시 일하라고 독려한다. 다만 이 교황도 나름대로 뒤끝은 있던지라, 과거 로마를 털었던 카를 5세에게 여전히 앙금이 있어서 그 분노를 담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하는데 그 적임을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 간혹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약간 황당한 성벽을 이 때와 연결시켜 그가 방위 대책 위원으로 훌륭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성벽은 다른 때에 설계한 성벽이다. 오히려 임기응변으로 양가죽을 이어만든 천을 이용해 대포 공격을 막는 등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방위대책 위원이었다. 건축공학이란 건 엄연히 전략기술에 속하며 레오나르도도 미켈란젤로도 예술 이전에 전략기술자였던 것. 하지만 어쨌든 그가 몸담은 피렌체는 결국 졌다. *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추남]]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비뚤어진 코인데, 어린 시절 공방 제자 시절에 다른 공방학생의 작품을 신랄하게 까내렸다가 분노의 [[수정펀치]]를 얻어맞고 코가 부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미켈란젤로는 남을 까는 것에 대해 많이 신중해졌다나. '''물론 옛날에 비해서는''' 말이다. 그 후 예술가로서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다시 독설이 독해졌다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유해진 경향이 있다. *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유별난 행동은 자신의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스케치들도 확실하게 미켈란젤로 것인지 알수있는 것들은 매우 적다. 위작으로 판명난 것도 굉장히 많은 편. 정확히는 모든 작품에 스케치를 하기는 했지만, 작품이 끝나고 혹은 말년에 대부분 다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던가, 그런 흔적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다빈치가 스케치북과 노트를 몇 십 권이나 남겨 놓은 것에 비해 대비된다. * 베네치아의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 [[https://www.google.co.jp/search?sxsrf=ALeKk01BHWEf2WL1QlhU8LJcwtlSQATqcw:1606402652049&q=%EB%8B%A4%EB%82%98%EC%97%90&stick=H4sIAAAAAAAAAONgecR4mpFb4OWPe8JSBxknrTl5jXEXIxdXcEZ-uWteSWZJpZAOFxuUpcQlIMWjn65vmJFjnF6RU2SmwSDFx4UiIqTJxRmUmpNYkpoSki8kw8Urxamfq29gaGKSWwZUzc2F4CoFG7nvujTtHJujIAMQzDkb6CClqSXExe5Z7JOfnJgjOMeCsWHan_f2WsJcHCGJFfl5-bmVYKUMDB_slTg5gfSCgGtH7LUYmvatOMTGwsEowMCziJXzdfeS100z3kyfAADLjyA33QAAAA&sa=X&ved=2ahUKEwio5cObvKDtAhWSFogKHcbXCdQQ6RMwFHoECAwQAg&biw=1529&bih=843|<다나에>]]을 보고 한마디 하기도 했다. "우아한 양식을 터득했고 생생한 기법을 구사하지만 데생의 기본을 배우지 않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훈련이 부족한 것 같다. 만일 그 단점만 보완한다면 완벽한 화가가 될 텐데."라고 했다. 훗날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 슈퍼스타 국제화가로 성장한다. 특히 티치아노는 유럽의 군주들의 의뢰를 받고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그려주고 후한 사례를 받는 등 군주와 예술가가 본격적으로 계약을 통해 미술품을 주고 받는 관례를 확립시키면서 예술가의 재정 기반을 크게 확대해놓는다. [[사코 디 로마|로마를 털어버린]] [[카를 5세]] 황제와 그의 콩라인 라이벌인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까지 그릴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열어 미술사적으로는 [[피카소]]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까지 평가받는 인물. 그러나 이는 미켈란젤로가 후배 예술인의 작품에 대한 심미안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인체를 묘사하는 기법의 차이로 인한 이견이었다고 보면 된다.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형태 묘사에 주력했다면 티치아노는 자유로운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능했다. 물론 티치아노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매우 능한 화가라서 그가 그린 군주들의 플레이트 갑옷을 보면 갑옷의 질감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놨다. * 한 성당에서 성가정[*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요셉]].]을 소재로 한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본좌급의 실력으로 매우 잘 그려놓았지만, 요셉의 얼굴이 매우 우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에 신부가 왜 이러냐고 물으니 미켈란젤로 曰, "친아들이 예수가 아니잖아요." *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나 조각에 나오는 여인들을 보면 근육미가 남다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면 여성마저도 남성적으로 그려놓았다. 실제 여성에게 없는 근육이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 여기에 대해서 앞서 언급된 대로 금욕주의자라서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당시에는 나체 모델이 되어줄 여성이 없기에 남자 모델을 보고 여자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 주요 의뢰주였던 성직자들을 비꼬거나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그니까 성직자가 지적하면 '여자 알몸을 잘 아시네요?' 같은 식으로.] 또 여성의 신체를 균형미가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여성을 비하했다기보다 미켈란젤로 본인의 미적 감각이 남성의 신체적 미를 더 선호했다는 편으로 이해하자.[* 사실 이 같은 경향은 미켈란젤로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미술에서 여성 누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최근이고, 당시 '육체미'와 같은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 본인이 남긴 로맨틱한 시를 보면 괄괄한 성격의 거장이 의외로 수줍은 면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근육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묘사는 너무나 뛰어났고 이 과정에서 불법으로 [[해부]]를 했다가 옥살이를 할 뻔한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기실 미켈란젤로는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는 주의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며, 눈치채기 힘들지만 극적인 표현이나 더 나은 전달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율조차 희생하는 편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피에타]]와 다비드 상 모두 정면이나 위에서 바라보면 비율이 심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은 성모가 예수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비드 상은 황금 비율은 어디 팔아먹은 [[대두]]다. 이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게 되는 조각상의 특성상 비율을 정확히 지켜서 만들면 오히려 위쪽에 있는 얼굴 부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눈치채기 힘들다고 말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이를 사람들이 '이상한데?' 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을 속이는 기술이 뛰어났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이 기술에 뛰어났다기보다 본격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듯. 그 이전의 예술가들도 이런 과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스승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림에서 느껴질 수 있듯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그냥 인체 비례를 잘 못 맞춰서 이런 경우도 있고, 도나텔로의 다비드에서처럼 앞쪽의 곡선미를 강조하다가 뒷 쪽의 사실성을 포기해 버리는 등 미켈란젤로만큼 능수능란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과장을 통해 당대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체의 역동성에 대한 표현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바로 이 점이 미켈란젤로가 미술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회화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회화들을 본다면 미켈란젤로만큼 인체의 역동성을 탁월하게 잘 살린 예술가는 없다. * 글을 읽지 못하는 하인을 위해서 식료품 목록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긴 메모가 화제가 [[https://www.news1.kr/articles/?1495212|됐다.]] [[분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